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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 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 ‘니산정’ 해체 수리 공사 착공식
척암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의병활동을 논의했던 유일한 유적
 

구한말 초기 의병활동을 주도하고 을미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척암 김도화 선생의 유일한 유적인 ‘니산정’을 해체 수리할 예정이다. 실제 척암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의병활동을 논의했던 니산정은 그동안 문화재로 지정는 물론 제대로 관리비 조차 되지 않아 쓰러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번에 종손 김동호씨를 비롯한 문중이 힘을 합치고 안동시와 안동문화지킴이의 후원으로 해체 수리 공사를 하게 되었다. 김도화 (金道和 : 1825生 ~ 1912卒) 선생의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 본관은 의성(義城).구와(龜窩) 김굉의 증손이며 김약수(金若洙)의 아들로서 안동의 일직면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인 김굉은 대산 이상정의 문인이고 모친 정씨는 입재 정종로 (立齋 鄭宗魯)의 손녀이며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의 외손녀이다. 퇴계학통의 적전이라 할 이대산의 학통이 손재 남한조로 이어지고 다시 정재 유치명으로 전승 되었는데 척암 김도화는 이러한 가문의 영향으로 25세인 1849년부터 정재 유치명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스승이 서거하자 서전(敍傳)을 짓고 기문록(記聞錄)을 작성하였다.

68세에는 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69세인 1893년 유일(遺逸)로 의금부 도사를 제수 받았다. 72세인 1896년에는 의병대장으로 추대 되었으며 여러차례에 걸처 상소문을 올렸는데 특히 이등박문에게 격고통감문(檄告統監文)을 보냈다. 왕명으로 의병이 해산되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두문불출하였으며 당시 영남유림의 태산북두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하에는 동산 유인식, 오헌 김홍락, 해창 송기식, 경암 백규,야산 정창조, 석암 홍의흠, 화남 김만조등을 비롯하여 400여명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척암 김도화 선생은 조선말 서산 김흥락과 함께 퇴계학통 적전 계승자로서 대표적 양대 맥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적 경향은 주로 의리론에 있었고 80세가 넘어서도 의병 항쟁을 계속하였다. 88로 졸하였다. 저서는 척암집 36권18책. 속집 14권6책.부록 2책. 별집2책이 전한다.

올곧은 유학자로서의 도(道)와 의(義)를 행하기 위해 노력한 분으로 오로지 민생을 돕고 국권(國權)을 지켜서 후세에는 망국의 한을 되풀이 않도록 하는데도 목숨을 건 척암 선생의 유적인 니산정 해체 수리 공사 국내 최초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2010-12-01 오전 9:29:00 / 안동문화지킴이
©2025 andong.net
2010-12-01 오전 9: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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